노노(老老 )케어

실제 노노(老老)케어 현장 기록: 돌보는 노인과 돌봄 받는 노인의 이야기

idea250625 2025. 6. 27. 09:05

돌봄의 현장에는 '통계'보다 더 진한 삶이 있다

노인을 돌보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젊은 이들의 역할’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고령화되면서, 이제 노인이 다른 노인을 돌보는 노노(老老)케어 구조는 현장에서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 개념은 언뜻 보면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는 돌봄의 따뜻한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노노(老老)케어 현장의 기록


하지만 실제 현장을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감정의 소진, 체력의 한계, 그리고 끝나지 않는 고독감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특히 공공복지의 한계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시작된 지역사회 기반의 노노(老老)케어는 이제 전국의 많은 지자체에서 정규 사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제도 안의 활동자들이 마주한 현실, 그리고 제도 밖에서 고령자를 돌보는 또 다른 고령자의 이야기는 제도 설계자나 행정 통계에서는 절대 읽히지 않는 영역이다.

이 글에서는 경기도 모 지역의 노노(老老)케어 활동 현장을 기록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돌보는 노인과 돌봄을 받는 노인 사이에 어떤 감정의 흐름이 오가고 있으며, 이들이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구조가 앞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어떤 전환이 필요한지를 진지하게 조명해본다.

 

돌보는 노인의 하루 –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는 게, 요즘 내 삶이에요"  

이금자(가명) 씨는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서 ‘노노케어 활동자’로 3년째 일하고 있다.
올해 73세인 그는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오전마다 근처 단독주택 단지에 사는 83세 김종기(가명) 어르신 댁을 방문한다.
이 씨는 요양보호사도 아니고, 정규 복지사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살아 있는 이웃'이라 표현한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말벗이나 안부 확인만이 아니다.
가볍게 웃으며 “오늘 약은 잘 챙기셨어요?”, “밤에 화장실 몇 번 가셨어요?”라고 물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그 안에는 돌봄을 받는 어르신의 신체 상태, 정서 상태, 생활 리듬에 대한 촘촘한 확인이 녹아 있다.

이 씨는 “누군가를 돌보는 게 꼭 도움을 주는 일만은 아니에요. 그분을 걱정하는 마음이 내 일상에도 영향을 주거든요.”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지난 1년간 무릎 통증이 심해졌고, 심장도 좋지 않아 정기 검진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봄을 멈추지 못한다.
“내가 안 가면 그 어르신 하루 종일 사람 얼굴 못 보고 지내요. 돌봄이라는 게 꼭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 하루에 ‘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거죠.”

그는 활동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앉아 있고 싶다고 말한다.
그 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어서'다.
돌보는 노인에게도 이 활동은 단순한 봉사나 일자리 이상의 의미, 즉 존재감과 사회적 연결감을 제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피로하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겠지요. 그때가 두려워요. 나처럼 돌보는 사람이 없을까 봐.”

 

돌봄을 받는 노인의 시선 – "나는 무언가를 빼앗긴 것 같아요"

이 씨가 방문하는 김종기 씨는 올해 83세로, 5년 전 뇌졸중 이후 한쪽 팔과 다리에 마비 증세가 남아 있다.
그는 두 아들이 있지만 모두 타지에 거주하고, 배우자는 이미 10년 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 씨는 이 씨가 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식사와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요양보호사 파견 대상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도 비용 부담으로 단 한 번도 부르지 못했다.
이 씨가 오면서 처음으로 “사람과 하루에 두 마디 이상 말하는 날이 생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 씨에게 돌봄은 단순히 고마움만 있는 감정은 아니다.
그는 “이제 나는, 나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약 먹으라면 먹고, 운동하라면 움직이고, 누구 만나라면 만나고…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이제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야 하니까요.”

이 말은 돌봄을 받는 입장에서의 정체성 상실과 자율성 저하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보여준다.
고령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동시에, 자신이 여전히 결정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는 말했다.
“이 씨가 나한테 뭔가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정말 따뜻한 사람이죠. 근데 이상하게도,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이 말은 노노(老老)케어라는 돌봄 구조가 ‘돌봄이 필요한 사람’의 감정까지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지원 제공이 아니라, 존중과 관계 형성의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감정 노동으로서의 노노(老老)케어 – 돌보는 이도 보호가 필요하다

돌봄의 현장을 계속 관찰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돌보는 노인 역시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금자 씨의 사례처럼 많은 노노(老老)케어 활동자들은 자신의 건강 문제를 안고 있고, 정기적인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도 활동비 몇십만 원을 받으며 정서적 책임감까지 떠안고 있다.

특히 돌봄이 단기간이 아닌 1년 이상 지속될 경우, 활동자에게는 ‘감정 피로’가 명확히 나타난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그분이 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건 아닐까?”, “내가 아프면 그분은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은 죄책감, 부담감, 불안감으로 바뀌며, 정서 소진(burn-out)을 가속화한다.

노노케어는 신체 활동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정서 상태까지 살펴야 하는 고강도의 감정 노동이다.
하지만 많은 지자체에서는 활동자에게 단순한 활동비 외에 정서관리 프로그램이나 심리 상담, 관계 조정 교육 등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돌봄 제공자도 정서적으로 고립되거나 갑작스럽게 활동을 중단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2024년 한 지역 돌봄센터의 보고에 따르면 노노케어 활동자 중 28%가 ‘돌봄 관계에서 감정적으로 지쳐본 적 있다’고 응답했다.
그 중 10%는 자신이 심리 상담이 필요함을 인식했지만, 관련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 구조는 노노(老老)케어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 반드시 제도적 정비가 필요한 지점임을 보여준다.

 

제도 안에서 관계를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노노(老老)케어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 기반 서비스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의 목적은 단순한 돌봄 기능 제공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돌봄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노케어 활동자는 단순히 ‘일시적 봉사자’가 아니라 정서적·육체적 노동을 수행하는 복지 주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활동자의 건강, 심리 상태, 관계 피로도 등을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필요 시 상담, 휴식, 교육 연계를 제공하는 사전 예방 체계가 필요하다.

또한 돌봄을 받는 고령자에게도 ‘의견을 말할 권리’와 ‘관계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지자체는 매칭 시점부터 돌봄 대상자의 성격, 생활 패턴, 정서적 요구 등을 고려해 돌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궁합을 맞추는 ‘관계형 설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효율성뿐 아니라, 돌봄 자체가 인간적인 관계로 작동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구조는 ‘노인 돌봄은 당연히 가족이나 동년배가 한다’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노노케어는 노인들이 자신도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 그리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줄 수 있다는 존엄의 회복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복지의 이름으로 기능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노인들의 연대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우리는 노노케어라는 구조를 이야기할 때 “노인이 노인을 돕는다”는 아름다운 구호를 앞세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지나치게 조용해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애씀이 존재한다.
돌보는 노인도, 돌봄을 받는 노인도 각자의 위치에서 외롭고 피곤하다.
하지만 서로가 존재함으로써 일상의 균형을 억지로라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이들의 애씀을 ‘개인의 선의’로만 해석하지 말고, 제도와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여야 할 때다.
노노(老老)케어는 복지의 보조 모델이 아닌, 고령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사회적 기반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물어야 한다.
“돌봄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돌봄이 인간적인 관계로 작동하고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