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은 단지 도움일까, 아니면 삶의 관계일까?
노노(老老)케어라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고령자가 또 다른 고령자를 돌보는 구조는
초고령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적인 돌봄 방식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국가도 지자체도 이 구조를 활용해
부족한 공공 자원을 보완하고,
지역 내 돌봄의 촘촘한 연결망을 구축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돌봄을 말할 때,
대부분 ‘돌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해왔다.
누가 돌보는가, 어떻게 돌보는가, 얼마를 받고 어떤 활동을 하는가 등이
주요한 정책·언론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돌봄은 일방적 제공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돌봄을 받는 사람의 감정, 생각, 경험이 깊숙이 스며 있다.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서비스 이용이 아니다.
그 안에는 존엄과 체면, 자존감과 수치심, 필요와 거절의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노노(老老)케어 수혜자들이 느끼는 ‘돌봄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철학적인 주제다.
이 글에서는 돌봄을 받는다는 것의 실제 의미를
노노케어 수혜자들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그들의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돌봄의 정체성, 관계의 복잡성, 그리고 제도적 과제를 함께 살펴보자.
‘받는다’는 것은 주는 것보다 어렵다: 돌봄의 수동성에 대한 저항
돌봄이라는 단어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주는 행위’를 먼저 떠올린다.
도움을 주고, 식사를 챙기고, 병원에 동행하고, 안부를 묻는 행동들 말이다.
그러나 정작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특히 고령자에게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기능 저하와 의존 상태를 인정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는 단지 신체적인 불편함을 넘어
자존감, 체면, 인생 전체에 대한 감정적 충격을 유발한다.
“나 혼자 밥을 못 해서 누가 반찬을 가져다줘요.
그런데 그게 고맙기도 한데, 자꾸 자존심이 상해요.”
“누가 내 방을 정리해주는 걸 보면 ‘내가 그렇게 무능해졌나’ 싶어 울컥할 때가 있어요.”
이런 감정은 단지 개인적인 성격 문제나 고집이 아니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존재의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감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목소리다.
많은 수혜자들은 돌봄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거나 민망하게 여긴다.
“쟤는 이제 다 늙어서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야”라는 인식을
주변에서 듣거나 느끼는 순간,
자신이 사회에서 한 발짝 밀려났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돌봄은 단지 편리함이나 안정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존엄과 자율성을 시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노노(老老)케어의 수혜자 경험을 이해하려면
이 ‘받는다는 것의 심리적 무게’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돌봄은 감정의 균형이다: 고마움과 불편함 사이
노노(老老)케어 수혜자들은 대부분
돌봄 제공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자식도 바쁘고, 복지 서비스는 조건이 까다로운 상황에서
가까운 이웃이 매일 찾아와 식사를 챙겨주고,
말벗이 되어주는 것은 실질적인 위안이 된다.
하지만 그 고마움이 항상 편안한 감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마움이 쌓이면 미안함이 되고,
미안함이 지나치면 스트레스로 변한다.
“그분이 없으면 정말 불편하죠.
그런데 자꾸 내가 부담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도움을 받으면 받는 대로,
또 매번 고마워하는 표현을 해야 하니까 그게 피곤할 때가 있어요.”
이런 표현은 돌봄 관계의 정서적 균형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제공자와 수혜자가 동년배이거나
오랜 지인 관계일 경우,
정서적 거리 조절은 더 어렵다.
“어제는 말을 안 걸어서 섭섭해하더라고요.
그날은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인데…”
같은 일도 관계에서 기대와 의무로 전환되면
감정의 피로를 낳는다.
돌봄은 ‘주고받는 일’이지만,
그 ‘주는 일’과 ‘받는 일’ 사이에는
감정의 조율이 필요하다.
수혜자들은 단지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돌봄 제공자와의 정서적 균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유지하려는
‘배려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돌봄은 서비스가 아니라 내 일상의 일부예요”: 구조 속에서 관계를 재구성하는 경험
많은 수혜자들은 노노(老老)케어를 단순히
복지 차원의 지원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일상 속 관계를 재구성해주는 구조라고 느낀다.
“그분이 오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씻고 정리하려고 노력하게 돼요.”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까,
아예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눕는 일은 없어졌어요.”
이런 반응은 돌봄이 단지 물리적 서비스 제공을 넘어서
수혜자의 삶의 흐름을 다시 세우는 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특히 고립되어 있는 고령자들에게
돌봄은 사회적 연결의 마지막 끈이 되기도 한다.
“전화라도 한번 오는 게
내가 이 사회에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요.”
이 감정은 단순한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존재의 확인, 사회적 소속감의 회복이라는 깊은 차원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수혜자 중 일부는
돌봄을 받으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분이 힘들다고 하면 나도 같이 반찬을 나눠요.
그냥 받는 입장이 아니고, 같이 사는 느낌이랄까요.”
이러한 경험은 돌봄이 수혜자에게
수동성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을 회복시키는 구조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수혜자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선택권, 의견, 거절권의 존중
현재의 노노(老老)케어 시스템은 대부분
돌봄 제공자 중심의 운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활동 시간, 활동 범위, 활동 내용은
제공자의 건강 상태와 운영 기준을 바탕으로 설계된다.
그러나 돌봄을 받는 수혜자에게도
선택할 권리와 거절할 권리,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새로 오신 분이 너무 친한 척을 해서 불편했어요.
그런데 거절하면 다음부터 안 올까 봐 말도 못 했어요.”
“나는 밥보다 병원 가는 게 더 급했는데,
그건 활동 범위가 아니라면서 못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경험은 수혜자들이
자신의 돌봄 환경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구조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돌봄은 무조건적 호의가 아니라
상호적 동의와 조율 위에 서야 한다.
수혜자는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또한, 돌봄 제공자의 성별, 성격, 활동 방식 등에 대해
수혜자의 취향과 필요를 고려한 매칭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어야 하며,
부적합한 관계에 대해서는
수혜자가 언제든지 요청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수혜자는 ‘조용한 고마움’으로만 존재해왔지만,
이제는 ‘목소리 있는 주체’로
돌봄 제도의 한 축으로 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돌봄의 기본 조건이다.
돌봄의 정체성은 ‘받는 사람’의 삶 안에서 완성된다
노노(老老)케어는 돌봄을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시도다.
그러나 그 구조가 진정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의 감정과 삶까지 고려되어야 한다.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엄과 자율성, 감정과 관계, 일상과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받는 행위다.
노노(老老)케어 수혜자들은
감사하면서도 불편하고,
의존하면서도 자립을 원하며,
돌봄을 받으면서도 관계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제도의 중심에 놓을 때,
비로소 돌봄은
한 방향의 시혜가 아닌,
두 방향의 삶의 동반자 관계로 진화할 수 있다.
진짜 돌봄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제 그 ‘함께’ 안에는,
돌봄을 받는 사람의 말도 포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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