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老老)케어의 언어: 우리가 쓰는 말이 돌봄을 지배한다
말은 돌봄을 설명하지 않는다, 돌봄을 만든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돌봄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살핀다’, ‘도와준다’, ‘돌봐야 한다’는 표현은 익숙하게 쓰이고,
‘노노(老老)케어’라는 용어 역시 이제는
고령자 돌봄 정책의 중심 언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돌봄을 설명할 때 쓰는 단어, 말투, 표현들은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서,
돌봄을 어떻게 인식하고 정의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힘을 갖고 있다.
말은 그저 설명이 아니다.
언어는 돌봄의 위계를 만들고, 관계를 규정하며,
누가 주체이고 누가 대상인지 경계를 긋는 도구다.
심지어 어떤 말은 수혜자에게 상처를 주고,
어떤 말은 제공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며,
어떤 말은 제도 전체를 왜곡된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노노(老老)케어 현장에서 사용하는
‘돌봄의 언어’를 중심으로,
그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감정, 권력, 위계, 인식의 프레임을 구성하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존엄한 돌봄을 위한 새로운 언어 감각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챙겨야 할 사람”이라는 말이 만드는 무력감과 대상화
노노(老老)케어 현장에서
돌봄 제공자들은 흔히 수혜자를 ‘챙겨야 할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저 어르신은 내가 꼭 챙겨야 해요.”
“그분은 스스로 못 하시니까, 매번 도와드려야 해요.”
이러한 말은 선한 의도로 쓰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수혜자를 수동적 존재, 능력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언어다.
실제로 돌봄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또 챙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가”라는
자존감 저하, 수치심, 불편함이 뒤따르게 된다.
특히 고령자들은 스스로의 자율성과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의 ‘관리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은
삶의 의미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언어는 관계를 만든다.
‘챙긴다’는 말은 그 자체로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의 위계를 만들고,
수혜자는 점점 의견을 내기보다는 ‘조용히 받는 사람’으로 남게 된다.
노노(老老)케어가 지속 가능하려면,
수혜자도 돌봄 관계 안에서
능동적인 존재, 의사 표현이 가능한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 시작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이 생활을 조율하는 분”,
“함께 일상을 나누는 이웃”이라는 표현은
수혜자에게 ‘도움받는 존재’라는 낙인 대신,
관계의 동등성과 존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
“힘드시죠?”라는 말이 항상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돌봄 제공자들은 흔히 수혜자에게
“많이 힘드시죠?”, “불편하신 건 없으세요?”라는 질문을 건넨다.
이는 배려이자 관심이며,
상대방의 상태를 살피려는 기본적인 돌봄 언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이 반복될수록,
수혜자는 자신이 끊임없이 ‘힘든 사람’, ‘약한 사람’, ‘의존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고령자 중에는 정말 불편함을 겪는 이들도 많지만,
모든 노인이 항상 ‘도움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다.
일상의 대부분을 스스로 해결하면서도
단지 말벗이 필요한 경우,
가끔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마다 “괜찮으세요?”, “도와드릴까요?”, “힘드시죠?”라는 말이 반복되면,
그 말은 더 이상 배려가 아니라
‘너는 도움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다.
돌봄 언어는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기준으로 조율되어야 한다.
말의 목적이 아닌, 말의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럴 때 “요즘 식사는 입맛에 맞으세요?”,
“오늘은 좀 괜찮은 하루셨나요?”처럼
상태를 단정하지 않고,
경청을 유도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힘들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언어야말로
진정한 존중의 돌봄 언어다.
“우리는 돌봐야 해요”라는 집단 언어가 만드는 정체성 고정
노노(老老)케어 활동자들은 종종
지역사회 내에서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돌봐야 해요.”
“이 마을 어르신들은 우리가 지켜야 하죠.”
라는 식으로 집단적 사명감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연대감과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수혜자들은
이 언어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다.
‘나는 지켜져야 할 존재인가?’,
‘나는 늘 누군가의 책임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특히 고령 수혜자 중 상당수는
과거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제는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
삶 전체가 단지 ‘수혜자’로 환원되는 느낌을 받을 때,
존재의 불균형감과 정체성 혼란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제공자 입장에서도
‘우리가 돌봐야 한다’는 강박은
자칫 감정 노동의 부담과
역할에 대한 피로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책임은 긍정적일 수 있지만,
그 책임이 ‘멈추면 안 되는 의무’로 고정될 경우,
돌봄은 의무감에 묶인 수행 과제가 되어버린다.
‘돌봐야 한다’는 표현보다는
“우리는 함께 일상을 만들고 있어요.”
“이 마을은 서로 살아가는 구조예요.” 같은
관계적, 상호성 중심의 표현이
돌봄의 방향과 정체성을 훨씬 건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말하지 않는 것도 언어다: 침묵과 생략이 주는 상처
노노(老老)케어 현장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직접적인 말뿐 아니라,
생략된 말, 무심코 지나친 표현, 침묵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활동자가 수혜자의 요청을 듣고도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라고 간단히 말할 때,
그 말 속에는 아무 설명도, 감정도, 대화도 없다.
이런 말은 제도적 한계를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수혜자 입장에서는
“내가 한 말은 의미 없었다”,
“나는 거절당한 존재다”라고 느낄 수 있다.
또한, 반복되는 생략은
돌봄을 받는 사람의 권리를 소거시킨다.
예를 들어, 방문 일정을 바꾸면서
“내일은 못 와요”라고만 말할 경우,
‘왜 못 오는지’, ‘대체 방문은 가능한지’,
‘나의 필요는 고려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수혜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수혜자를
일방적으로 돌봄을 전달받는 객체로 만들며,
돌봄의 관계가 소통이 아닌 ‘전달과 수용’으로 굳어진다.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도 돌봄의 언어다.
존엄한 돌봄은
침묵 없는 설명,
거절 뒤에 이어지는 제안,
요청에 대한 진심 어린 경청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어를 바꾸는 순간, 돌봄이 달라진다
노노(老老)케어는 제도로, 관계로, 공동체로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이 구조가 진짜 사람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선
말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돌봄 안에서 쓰는 단어,
말투, 표현, 침묵, 질문 방식은
단지 의사 전달이 아니라
존엄의 경계선, 관계의 방향성, 신뢰의 조건을 결정짓는 힘이다.
좋은 제도, 넓은 예산, 강한 정책도
잘못된 언어로 표현되면
오해를 낳고 상처를 남긴다.
반대로, 부족한 자원 속에서도
말이 따뜻하고 존중을 담고 있다면,
돌봄은 관계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노노(老老)케어의 지속 가능성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지속 가능성 위에 놓여 있다.
돌봄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말하며,
어떤 질문을 하느냐의 축적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말을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그 질문이
돌봄을 돌봄답게 만들고,
돌봄을 존엄하게 지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